자료설명
[자료]는 『신한민보』 1924년 6월 24일자에 실린 장인환의 석방기념 축하모임 때의 사진으로,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앞에서 촬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장인환(앞줄 왼쪽에서 8번째)은 Mr.Chang이라고 메모되어있으며, 그 왼쪽이 전명운이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친일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 총을 쏜 사람은 장인환(1884~1947)과 전명운(1876~1930)이었다.
스티븐스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외교와 재정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게 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인물이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1908년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라는 친일 발언을 하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한인들을 분노케 했다.
1908년 3월 23일 아침, 스티븐스는 일본정부의 밀명으로 워싱턴에 가기위해 페리부두에 도착했고, 전명운은 권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발하였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뒤이은 장인환의 저격이 명중하여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 도중 사망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같이 의거를 계획하진 않았지만 ‘스티븐스 처단’이라는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항일 의열투쟁의 서막을 함께 열었다.
미국 현지 언론은 두 사람의 의거를 애국적인 사건으로 대서특필하였고, 미국 거주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두 사람의 재판 비용을 지원하였다. 전명운은 살인미수혐의로 미국법정에 섰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선고를 받았다. 장인환은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25년형의 금고형을 선고 받았으나 미주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10년 만인 1919년 1월에 가석방되었다.
참고문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독립기념관, 2013.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 아카데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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