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학습자료

오늘의 사건과 자료

안중근 의사 순국 (1910. 03. 26)

3월 26일, 오늘은 중국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사가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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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 #동양평화론 #안중근 #이토히로부미

자료설명

 본 [자료]는 안중근(1879~1910)의사가 1910년 3월 중국 뤼순 감옥에서 쓴 글씨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라고 쓰여 있다. ‘이익을 보거든 의로운 지에 대해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는 뜻으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인 『논어』 「헌문(憲問)」편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왼편에는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 적혀있는데 ‘경술년 3월 뤼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좌측 맨 아래쪽에는 안중근의 손도장이 찍혀있는데,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마디가 잘린 상태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1909년 2월, 러시아에서 12명의 동지와 모여 왼손 약지를 절단하고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맹세하며 결성된 ‘단지동맹(동인단지회)’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1972년 보물로 지정된 원본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며, 독립기념관 소장중인 이 [자료]는 복제본인 원본에 비해 손바닥 인장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09년 가을, 을사늑약 강제체결의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서의 미국세력 확대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을 하려고 만주 지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동지들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오전 7시경 미리 도착하여 심신을 가다듬으며 준비하고 있던 그는 오전 9시 30분경  수행원을 거느린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의장대 뒤쪽에 있다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탕!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총을 세 발 쏘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당했고,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라고 외쳤다. 총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이후 러시아에 의해 일제에 넘겨져 여러 번 재판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 3월 26일 오전10시 뤼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며, 200여 점의 글씨를 써 남겼다. 그 중 31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윤경로, 「안중근의거 배경과 「동양평화론」의 현대사적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36, 2010.
최덕규,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3, 한국민종운동사학회, 2012.

탐구활동

하얼빈 의거 장면을 담은 민족기록화(박영선 화백, 1976년 作)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묘사된 당시 장면을 살펴보며 그때의 상황을 되새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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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 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 안중근, 『안응칠 역사』에서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 서문에 적힌 하얼빈 의거의 의의를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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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며 당연한 일로 굳게 믿었고, 한국과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없앨 수 없거늘 하물며 한두 명의 꾀로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환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하여 힘을 다해 방어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 왜 이러한 순리를 무시하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돌아보지 않고 친구의 정을 끊어버려서 스스로 서양세력이 힘쓰지 않고도 이득을 얻도록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한청 양국인들의 소망이 크게 꺾이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더욱 심하게 핍박한다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한청 양국 사람들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면 상하가 일체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몇 억의 황인종 중에 뜻 있고 용기있는 이들이 팔짱을 끼고 있다가 동양 전체가 망해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그러므로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싸움을 하얼빈에서 시작했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는 여순으로 정했다. 이어 동양 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니 여러분은 깊이 살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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