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학습자료

오늘의 사건과 자료

독립문 건립 (1897. 11. 20)

11월 20일, 오늘은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완공한 날입니다.
콘텐츠 준비 중 입니다.
#개선문 #독립관 #독립문 #독립신문 #독립협회 #모화관 #심의석 #영은문

자료설명

 본 [자료]는 독립문 *정초식 초청장이다. 외국인 초대용은 영문으로, 내국인 초대용은 한글로 각각 쓰였다. 한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일에 청첩을 가지고 오시옵소서.

총대의원 이완용, 권재형, 이채연 

건양 원년 십일월 십사일 

대조선국 독립협회 회원들이 십일월 이십일일 오후 이시 반에 독립 공원에서 독립문 주춧돌을 놓을터인데 예식을 시행하고 축사를 연설할 터이니 각하의 참석하심을 바라옵니다. 


The Memb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Club

Have the honor to request your presence at the ceremony of the laying of The Corner Stone of The Independence Arch at half past two o’clock. 

Nov. 21th. at 

Independence Park

outside the West Gate

YI WAN YONG, Chairman

KWAN CHAI HYUNG,

YI CHAI YUN 

Nov. 14. 1896  Invitation Committee





 본 [자료] 하단부에는 총대의원으로 당시 외부대신 겸 학부·농상공부 임시서리이자 독립협회 위원장이었던 이완용(1858~1926, 친일인명사전등재자), 군국기무처 의원 권중현(1854~1934, 본명 권재형, 친일인명사전등재자), 한성판윤 이채연(1861~1900)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정부 전·현직 관료들이 독립협회의 초기 주도층으로 활동하며 독립문 건립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아관파천 이후 1896년 7월에 결성된 독립협회는 첫 번째 사업으로 청에 대한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의미로 독립문 건립을 추진하였다. 우선, 『독립신문』을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쳐 왕실, 학생, 교사, 기생 등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독일공사관 스위스인 기사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서양건축 조영경험이 있는 조선인 목수 심의석에게 공사감독을 맡겨 진행된 독립문 건립은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되었다.  

 1896년 11월 24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11월 21일 오후 2시 30분부터 시작된 정초식은 내외국인을 아울러 5-6천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독립문 들어가는 곳에는 푸른 나무로 홍예를 만들어 조선국기로 좌우를 단장하고, 문 위에는 흰바탕에 붉은 글자로 ‘독립문’이라 써 높이 달았다. 또한 문에는 독립협회기를 훌륭하게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게 하였으며, 목책으로 울타리를 쳐 안에는 정부 고위관료와 외국 공·영사들이 모여 앉거나 서 있었다고 한다. 정초식은 배재학당 학생들과 각 관립학교 학생들이 서 있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가’를 부르자 교사 아펜젤러가 조선말로  “조선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께서 성체가 안강하시고 조선독립이 몇 만 년을 지나도 무너지지 않게 되며 조선 전국 인민의 학문과 재산이 점차 늘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축수하였다. 이후 독립협회 초대회장 안경수와 한성판윤 이채연의 연설, 배재학당 학생들의 ‘독립가’ 제창, 외부대신 이완용의 연설, 서재필의 연설 등이 이어졌다.  

 독립문은 사적 제32호로, 현재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다. 문 앞에 남겨진 영은문(모화관의 정문)의 석재 초석(사적 제33호)을 통해 이 자리가 과거 조선시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며 환송연을 베풀던 모화관이 있던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영은문의 나무기둥과 기와지붕은 1895년 갑오개혁 당시 내각에 의해 철거되었고, 모화관은 1897년 5월 ‘독립관’이라 개칭되어 이후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 및 사무실 용도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건립된 영은문과 모화관이 19세기 말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 독립관으로 각각 재탄생한 것이다. 

● 정초식: 석조 또는 콘크리트 등 서양식 건축에서 초석을 놓는 의식. 건축 공사에 있어 공사착수를 기념하기 위해 계획하고 있는 건축물에 연월일을 기록한 돌(정초, 머릿돌, 주춧돌)을 설치하여 기념하는 행사.
참고문헌 권기하, 「독립협회의 결사·집회 문화와 정치적 공공성」, 연세대학교, 2020.
김세민, 「영은문, 모화관의 건립과 독립문, 독립관으로의 변천」, 『향토서울-82』,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2.

탐구활동

프랑스의 에투알 개선문과 독립문 사진을 보며, 어떠한 점이 닮았고 어떠한 점이 다른지 한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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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0cm 크기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독립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기둥 내부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이맛돌 위에 앞뒤 현판석에는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각각 한글과 한자로 새겼으며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붙였다. 프랑스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를 본떠 만들고, 홍예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은 서양식이지만, 돌을 쌓는 방식은 우리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독립문 정초식(1896.11.21.)때 찍은 사진을 보고, 당시 낭독된 서재필의 연설문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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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사람이 혼자 서는 것과 같아서 다리가 튼튼해야 몸무게를 싣고 능히 걸어 다니는 것이라. 나라의 다리는 곧 백성이요, 머리는 곧 정부라. 머리와 다리가 서로 도와주어야 그 몸이 튼튼하여 능히 서고 앉기를 임의로 할 터인데, 만일 머리가 다리를 상하게 한다든지 다리가 머리를 상하게 하면 그 몸이 병이 들어 운동을 못할 터인즉, 정부와 백성이 서로 위해 주어야 나라가 튼튼히 되어 독립이 될 터이라. 지금 새로 세우는 독립문을 가지고 비유할진대, 독립문이 혼자 섰으되 그 문 짓기는 돌멩이가 여러 백 개가 들어 서로 회와 모래에 합하여 서로 튼튼히 붙어 무게를 서로 받치고, 돌멩이마다 크고 잘고 다 힘을 써서 제 직무를 하여야 그 문이 여러 천 년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고 혼자 섰지, 만일 그 중에 돌멩이 하나라도 제 직무를 못하여 물러나온다든지 떨어진다든지 하면 그 문이 혼자 설 수가 없는즉, 나라도 대소 인민이 사람마다 제 직무를 하여야 나라가 영구히 독립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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