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학습자료

오늘의 사건과 자료

『독립신문』 창간 (1896. 04. 07)

1896년 4월 7일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입니다.
자료1. 『독립신문』 창간호의 제1권 제1호(1896.4.7.)
자료1. 『독립신문』 창간호의 제1권 제1호(1896.4.7.)
자료2. 『독립신문』 창간호의 광고면
자료2. 『독립신문』 창간호의 광고면
#갑신정변 #독립신문 #독립협회 #사민필지 #서재필

자료설명

 [자료1]은 『독립신문』 제1권 제1호(창간호, 1896.4.7.)의 제1면이다. ‘논설’부분에 독립신문 창간의 목적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함을 맞아 조선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주의를 미리 말씀드린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하므로 어떤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것이다.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것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것이니 ……(중략)……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는 것은 이익을 보려 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격을 저렴하게 했고 모두 한글로 써서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했으며, 또 구절을 띄어 써서 알아보기 쉽도록 하였다. ……(후략)”  

 [자료2]는 창간호의 광고 면으로, 상단부 둘째 줄 가운데에는 『사민필지』에 대한 광고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세계지리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마다 볼만한 책이니 학문상 유의하는 이는 종로 책전에서 사시오. 값은 여덟냥.” 

창간 당시 가로 22cm, 세로 33cm의 타블로이드 판 크기로 제작된 『독립신문』은 총 4면이었는데, 그중 3면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순 한글로, 1면은 영문으로 구성하여 주3회(화·목·토요일) 발행했다. [자료1]에서 볼 수 있듯, 1면에는 주로 정부시책을 국민들에게 해설하여 전달하고, 정부와 위정자들의 잘못 지적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함으로써 전근대적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소개하는 편집자의 논설을 실었다. 이는 『독립신문』의 국민계몽적 역할을 보여준다. 더불어,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쓴 세계지리서 『사민필지』를 비롯하여 서울 정동의 서양물건을 파는 회사 소개 등의 광고를 실은 [자료2]를 살펴보면 새로운 서양의 문화와 사상, 종교, 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어야한다는 『독립신문』의 문명개화론적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독립신문』에 당시 지식인은 물론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성장한 부유한 상인과 농민 등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또한, 『독립신문』은 구독료와 광고료를 바탕으로 운영하는 자생적 신문경영의 토대를 마련하여, 이후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 다양한 민간신문이 탄생하는 초석을 다지고 신문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1864~1951)은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주역으로서 정변 실패 이후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다. 이후 1895년 귀국한 그는 ‘국민계몽’에 큰 뜻을 품고 대중을 위한 신문의 발간을 계획, 추진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민중의식의 성장을 목표로 한 단체 독립협회의 결성 등으로 활약했으나 여의치 않자 189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남은 생애동안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힘썼다.
참고문헌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 일조각, 1986.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출판부, 2003.
정진석, 『한국 신문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탐구활동

『독립신문』 창간호 영문판에 실린 우리나라에 대한 짧은 기사를 통해 당시 우리나라의 외교관계를 생각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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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ster Min Young Whan, attache Yun Chi Ho, and Secretaries Kim Dik Yun, and Kim Do Il left for Russia in the 1st inst.
공사 민영환, 보좌관 윤치호, 비서 김득련(영어는 잘못 기록된 것으로 추정)·김도일은 4월1일에 러시아로 떠났다.]

기사는 고종으로부터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된 민영환과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이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을 의미한다. 이 기사에서 당시 고종이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간 피신하여 있었던 특수한 상황에서의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나라의 주요사건, 정책 등을 기사로 실어 알렸던 독립신문의 역할도 이 짧은 기사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 언론계가 정한 ‘신문의 날’은 4월 7일로, 해마다 이 날짜에는 전국 각 신문이 휴간을 하며 한 주 동안 각종 기념행사를 이어갑니다. ‘신문의 날’이 『독립신문』과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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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한 사실만 미루어보아도 『독립신문』아 우리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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