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학습자료

오늘의 사건과 자료

광복 (1945. 08. 15)

오늘은 35년 일제식민지배 아래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민족이 빼앗겼던 주권을 되찾은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동녕 장례식 (1940. 3. 17.)
이동녕 장례식 (1940. 3. 17.)
송병조 장례식(1942. 2. 27.)
송병조 장례식(1942. 2. 27.)
차리석 발인식 (1945. 9. 12.)
차리석 발인식 (1945. 9. 12.)

자료설명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까지 먼 타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서거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8월 15일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인물들의 마지막 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을 살펴보고자 한다.

총 3장으로 이동녕과 송병조의 장례식 그리고 차리석의 발인식 사진이다.



일흔이 넘도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동녕(1869~1940)은 1940년 지병인 천식이 악화, 급성폐렴으로 발전되어 중국에서 순국했다. 이동녕은 교육가로서 독립운동의 발판이 될 인재들을 기르고, 논설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으며, 임시정부 수립부터 광복군 창설까지 묵묵히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마지막 가는 순간에도 독립을 위한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송병조(1877~1942)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회계검사원장을 지내다 1942년 병사했다. 임시정부는 송병조가 사망하자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유해를 충칭 허상산(和尙山) 한인묘지에 안장했다.



차리석(1881~1945)이 임시정부에서 맡은 직책은 비서장과 국무위원 정도이다. 임시정부 수립에서 해방까지 27년간 임정을 떠나지 않고 살림을 도맡았기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차리석의 경우 한국 광복은 볼 수 있었으나 1945년 9월 9일, 임시정부의 환국을 준비하던 중 충칭에서 서거했다.  


참고문헌 박수현, 《차리석 - 임시정부와 흥사단을 이끈 독립운동계의 재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오대록, 《이동녕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연구》, 일조각, 1989.

탐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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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과 차리석의 유해가 국내로 봉안된 장소와 시기를 자료로 확인해봅시다.

'석오,동암 양 선생 유해 봉안식 부의록'
'석오,동암 양 선생 유해 봉안식 부의록'
이동녕과 차리석 두 분의 유해는 광복 후 김구가 국내로 모셔와 1948년 9월 22일 효창원에 봉안되었다.
사진(자료 표지 및 내지)에서 봉안날짜와 봉안지를 확인할 수 있다.

봉안지: 효창원(효창공원)
봉안일: (1948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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