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학습자료

오늘의 사건과 자료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 (1920. 02. 20)

2월 20일, 오늘은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설립이 결정된 날입니다. 비록 자금난으로 1921년 4월 문을 닫아야했지만, 우리 노력과 자본으로 비행사를 양성해 독립전쟁을 이어나가려 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적 의의가 있어, 임시정부 비행학교의 설립과 비행사 양성은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로 여겨집니다.
박희성 비행사 면허증
#김종림 #노백린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전쟁 #박희성 #안창호 #한인비행사양성소

자료설명

 [자료]는 독립운동가 박희성의 비행사면허증이다. 한인비행사양성소에서 비행술과 무선통신 기술 등을 공부한 박희성(1896-1937)은 1921년 7월 국제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에는 미국 정부는 국제항공연방(FEDERATION AERONAUTIQUE INTERNATIONALE)의 모든 조건을 충족한 박희성(1896년 5월 3일 출생한 Howard S. Park)에게 1921년 7월 7일자로 비행조종사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고 적혀있다. 

 비행기가 전투에 처음 동원되어 위력을 발휘했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전후한 때 미국·프랑스·독일을 비롯한 세계열강은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의 상징인 비행기 개발과 비행사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19년 10월에는 파리평화회의에서 국가간 영역권을 확립하고 국제항공 발전을 위한 ‘국제항공협약’이 채택되기도 했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정방침」에 ‘미국에 기량이 우수한 청년을 선발, 파견하여 비행기 제조와 비행전술을 학습하게 한다.’는 구절을 넣고 ‘비행대 편성’을 당면 방침으로 정했다. 당시 미국 거주 한인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신한민보』도 비행기 관련 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하며 조선의 독립에 공군의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처럼 비행기술과 공군의 필요성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인비행사양성을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안창호(1878-1938)는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원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등 비행기 구입과 비행사 채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비행군단 창설 임무를 위임받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1875-1926)은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오림하,이용선,이초,한장호 등을 만나 비행학교 창설과 운영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정보를 얻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들은 이후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에서 교관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 미국에서 벼농사로 큰 자본을 축적하여 “쌀의 대왕”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재미사업가 김종림(1886-1973)은 임시정부에 훈련용 비행기 3대와 활주로 건설비용을 제공하는 등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많은 이들의 관심과 노력 끝에 임시정부는 미국인 교관을 초빙하고 훈련생 15명을 선발하여 비행학교 개학준비를 마치고 1920년 7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한인비행사양성소 개소식을 거행 후 수업을 시작하였다. [자료]의 주인공인 박희성 역시 이때 입학한 훈련생 중 하나였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수업 과목에는 비행 훈련과 함께 무선전신학과 비행기수선학(정비)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업을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20년 11월 초, 추수기 대홍수로 김종림의 농장이 경제적 타격을 입자 그의 경제적 지원으로 설립·운영되던 한인비행사양성소도 자금난을 겪게 되어 결국 1921년 4월 중순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희성은 이때 1921년 1월부터 미국 새크라멘토에 있는 사립비행학교로 전학하여 비행술에 대한 학습을 이어나갔다. 같은 해 4월에는 미국 정부의 항공자격증을 따기 위해 비행시험을 치르다 공중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중상을 입었지만, 미국 동포들의 지원으로 치료를 받고 결국 미국비행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1921년 7월 18일 박희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초의 비행장교인 ‘비행병 참위(현 소위)’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명화, 「재미 실업가 김종림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김지원, 「근대 조선에서의 조선인 비행사들」, 『한일민족문제연구』 제39권, 1호, 한일민족문제학회, 2020.

탐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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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한인비행사양성소 교관들의 모습을 확인해보고, 현재의 비행사(파일럿)의 모습과 비교해보세요.

군무총장 노백린과 한인 비행사양성소 교관들
『독립신문』 1920년 4월 27일자 기사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에 실린 사진이다. 가운데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교관으로 활동했었던 인물들로, (좌로부터) 장병훈, 오림하, 이용선,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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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건물 모습을 확인해볼까요?

1920년 당시의 한인비행사양성소 건물 모습
이 사진은 독립운동가 임성실(1882~1947)의 사진첩에 수록되어있는 1920년 당시의 한인비행사양성소 건물 모습으로, 상단부에 “Training Camp, Willows, Cal”이라고 적혀있다. 학교 교사 정면에 성조기가 게양되어있고, 마구간과 창고가 보이며, 뒤편에는 학생들이 기숙하던 막사가 희미하게 보인다.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는 1918년까지 현지 학교로 사용되던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였고, 현재 이 건물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일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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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2. 17일자 『도산 안창호 일기』의 한 구절을 살펴보고, 그가 한인비행사양성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를 확인해볼까요?

1920.2.17일자 도산 안창호 일기의 한 구절
"황군으로 하여금 장거리 항공기 유무를 알아보게 할 것. 10만원 금액은 장차 준비할 만한 희망이 있다 함... (중략) 또 20만원을 사용하라는 비밀 내용을 말하여 이는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내 인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독립운동에 비행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였음이 안창호의 일기에 드러난다.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내 인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적힌 부분을 통하여 비행기를 사용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홍보하고, 독립운동 분위기를 진작시키려는 것에 비행기 구입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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