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설명
[자료]는 독립운동가 박희성의 비행사면허증이다. 한인비행사양성소에서 비행술과 무선통신 기술 등을 공부한 박희성(1896-1937)은 1921년 7월 국제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에는 미국 정부는 국제항공연방(FEDERATION AERONAUTIQUE INTERNATIONALE)의 모든 조건을 충족한 박희성(1896년 5월 3일 출생한 Howard S. Park)에게 1921년 7월 7일자로 비행조종사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고 적혀있다.
비행기가 전투에 처음 동원되어 위력을 발휘했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전후한 때 미국·프랑스·독일을 비롯한 세계열강은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의 상징인 비행기 개발과 비행사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19년 10월에는 파리평화회의에서 국가간 영역권을 확립하고 국제항공 발전을 위한 ‘국제항공협약’이 채택되기도 했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정방침」에 ‘미국에 기량이 우수한 청년을 선발, 파견하여 비행기 제조와 비행전술을 학습하게 한다.’는 구절을 넣고 ‘비행대 편성’을 당면 방침으로 정했다. 당시 미국 거주 한인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신한민보』도 비행기 관련 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하며 조선의 독립에 공군의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처럼 비행기술과 공군의 필요성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인비행사양성을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안창호(1878-1938)는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원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등 비행기 구입과 비행사 채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비행군단 창설 임무를 위임받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1875-1926)은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오림하,이용선,이초,한장호 등을 만나 비행학교 창설과 운영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정보를 얻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들은 이후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에서 교관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 미국에서 벼농사로 큰 자본을 축적하여 “쌀의 대왕”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재미사업가 김종림(1886-1973)은 임시정부에 훈련용 비행기 3대와 활주로 건설비용을 제공하는 등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많은 이들의 관심과 노력 끝에 임시정부는 미국인 교관을 초빙하고 훈련생 15명을 선발하여 비행학교 개학준비를 마치고 1920년 7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한인비행사양성소 개소식을 거행 후 수업을 시작하였다. [자료]의 주인공인 박희성 역시 이때 입학한 훈련생 중 하나였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수업 과목에는 비행 훈련과 함께 무선전신학과 비행기수선학(정비)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업을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20년 11월 초, 추수기 대홍수로 김종림의 농장이 경제적 타격을 입자 그의 경제적 지원으로 설립·운영되던 한인비행사양성소도 자금난을 겪게 되어 결국 1921년 4월 중순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희성은 이때 1921년 1월부터 미국 새크라멘토에 있는 사립비행학교로 전학하여 비행술에 대한 학습을 이어나갔다. 같은 해 4월에는 미국 정부의 항공자격증을 따기 위해 비행시험을 치르다 공중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중상을 입었지만, 미국 동포들의 지원으로 치료를 받고 결국 미국비행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1921년 7월 18일 박희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초의 비행장교인 ‘비행병 참위(현 소위)’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명화, 「재미 실업가 김종림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김지원, 「근대 조선에서의 조선인 비행사들」, 『한일민족문제연구』 제39권, 1호, 한일민족문제학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