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설명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중인 한인 청년들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해인 1918년 말 일본 거주 한인 유학생은 769명이었고, 그 중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거주한 유학생은 642명이었다.
낯선 타지생활에서 이들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따스한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유학생 모임이었다. 대표적인 유학생 단체는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로, 웅변회·운동회·졸업생축하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다. 특히 운동회는 많은 유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던 행사였다.
[사진 01]은 1917년 4월 촬영된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의 육상운동회 기념사진이다. 와세다중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는 4, 5백 명의 남녀 유학생이 모였고, 100m 달리기를 비롯한 각종 경기와 가장행렬이 펼쳐졌다. 사진 속 주인공인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2·8독립선언을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
한인유학생들은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 클로니클(Japan Chronicle)』 등 언론 보도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소식을 접하고 국제정세에 발맞춘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에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조소앙과 장덕수가 도쿄에 도착하여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궐기를 응원하였고, 뒤따라 온 이광수가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도쿄의 YMCA회관(조선 기독교 청년회 회관)에는 6백여 명의 한인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한다.”는 2·8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제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벌이겠다는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오후 3시 50분, 조선유학생들은 모임을 감시하던 사복 경찰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본 경관대에 맨손으로 저항하다 눈길에 끌려갔다. 이 사건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 일제의 중심부에서 독립을 외쳤던 ‘2·8 독립선언’이다.
[사진 02]는 감옥에 갇혔던 2·8독립선언 대표자들이 모두 출소한 뒤인 1920년 4월경에 찍은 것이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자는 모두 11명이었는데, 이 중 독립선언을 외국 언론에 알리려 중국으로 떠난 이광수와 불기소로 풀려난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이 출판법 위반으로 도쿄감옥에 투옥되었다. 가운데 줄이 대표자들로, 이들은 모두 9개월 형을 받았다.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이다. 7개월 15일 형을 선고받고 만기가 되어 앞서 출옥한 김상덕과 이종근은 이 사진에 없다. 대표자 이외의 사람들은 2.8독립선언을 뒷받침하며 대표자들이 체포된 후에도 2차로 운동을 계속 진행하고자 했던 학생들이다.
한인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이후에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국내외 각 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켜, 이후 국내 「3·1독립선언서」, 국외 연해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독립기념관, 2013.
독립유공자 공훈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