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 학습자료

오늘의 사건과 자료

조선어학회 사건 (1942. 10. 01)

10월 1일, 오늘은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말 큰 사전 편찬에 힘썼던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이 일제에 의해 피체되어 탄압을 받기 시작한 날입니다.
조선어학회 수난동지회 기념사진(1949.6.12.)
조선어학회 수난동지회 기념사진(194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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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설명

 본 [자료]는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사건을 기억하고 학회를 재건하고자 결성한 조선어학회 수난동지회 회원 22명의 모습이 담긴 단체사진이다. 1949년 6월 12일 첫 모임 후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앞줄 왼쪽으로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육국. 가운뎃 줄 왼쪽으로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으로부터 민영욱, 임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이다. 

 사진 속 인물들 면면을 살펴보면, 역사학자 안재홍, 부동산 사업가 정세권 등 국어학자가 아닌 인물들도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세권(1888~1965)은 각계각층이 참여했었던 조선어학회의 범민족적 성격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정세권은 1920년 회사령 폐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하고, 현재 명소가 된 서울 북촌 가회동 31번지를 비롯한 경성의 북촌일대와 20세기 초중반 경성의 뉴타운인 창신동, 서대문 일대 등을 개발한 성공한 부동산 사업가였다. 그는 사업가로서의 활동에서 더 나아가 자비로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건설하고, 운영비용을 부담하는 등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알게 된 이극로, 안재홍 등과의 인연으로 정세권은 조선어학회에 회관 건물(종로구 화동 129번지 소재)을 지어 기증하고 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뒷받침을 전담하는 등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고문당하고, 상당한 재산을 빼앗겼다. 정세권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광복 후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1957년 마침내 『우리말 큰 사전』을 완간하였다. 

 1910년 이후 일제는 강점기간 내내 식민지 동화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한국 민족 전체의 일본어 사용과 한국어 사용의 단계적 말살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각 급 학교에서 일본어를 교육하는 방침을 세워 실행했다. ‘조선어’라는 이름의 일제의 지방어로 전락한 우리말과 글은 교육과 사용이 제한되었다. 주시경(1876~1914)을 비롯한 학자들은 우리글에 ‘크다’, ‘으뜸가다’의 의미를 담아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911년 한글 사전인 ‘말모이’ 편찬사업을 착수했다. 이후 4년여 간 작업을 이어갔으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주시경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편찬사업은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그러나 당시 보통학교와 중등학교 교원으로 있던 주시경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해 한글을 연구하고 강연회 개최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7년부터는 기관지 『한글』을 창간하여 매월 발행하였는데, 한글 관련 지식을 널리 알리는 학술잡지였다. 

 1929년 이극로(1893~1978)가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면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외래어표기법 제정 작업을 하고, 그를 주축으로 자본가, 출판인 등 각계각층의 인물 108명이 모인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는 등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열린 정기총회에서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그리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36년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이어받아 조선어 큰 사전 편찬 완성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과목을 폐지하고 학교 안에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한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식민통치정책 중 일본어 상용화 정책에 위배된다고 여겼다. 지속적으로 조선어학회를 감시하던 일제는 결국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정태진을 고문하여 받은 허위자백서를 바탕으로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과 사전편찬을 후원한 관계자 33명을 검거하고 탄압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으로 피체된 인물들은 ‘민족어를 연구하고 보존, 보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한글운동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중 이윤재와 한징은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집행유예와 무죄를 받아 석방된 인물들 외에 치안유지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실형을 받은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이들은 광복 이틀 뒤인 8월 17일에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박용규,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한글학회, 2012.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2017.

탐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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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공포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의 표지와 내용 중 일부(된소리, 구개음화)를 살펴보며,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바탕이 된 일제강점기 국어학자들의 노고를 헤아려보세요.

한글마춤법통일안
○ 제 1절 된소리

한 단어 안에서 아무 뜻이 없는 두 음절 사이에서 나는 된소리는 모두 아래 음절의 첫 소리를 된소리로 적는다. (갑을 취하고 을을 버린다.)

갑. 아빠, 오빠, 어깨, 토끼, 새끼, 깨끗하다, 어떠하다, 어찌하다, 여쭙다
을. 압바, 옵바, 억개, 톡기, 샛기, 깻굿하다, 엇더하다, 엇지하다, 엿줍다

○ 제 3절 구개음화

자모는 다 제 음가대로 읽음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댜 뎌 됴 듀 디」를 「자 저 조 주 지」로,
「탸 텨 툐 튜 티」를 「차 처 초 추 치」로 읽음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부기 1>
ㄷ ㅌ 으로 끝난 말 아래에 종속적 관계를 가진 「이」나 「히」가 올 적에는 그 ㄷ ㅌ이 구개음화되는 것을 열외로 인정한다. (갑을 취하고 을을 버린다.)

갑. 밭이 굳이 핥이다 걷히다 묻히다 닫히다
을. 바치 구지 할치다 거치다 무치다 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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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된 인물들 중, 이극로, 최현배가 감옥에서 지은 시를 읽어봅시다.

「감옥에서 읊다」
-이극로(1893~1978)

어려움을 참고 사전을 만듦은
선비의 도리에 의무를 다함이다.
이런 일이 또한 죄가 되어서
마침내 진시황의 솜씨를 만났다.
가슴을 치며 울고는 싶으나
어찌하느냐, 이것도 자유가 없다.

「임 생각」
-최현배(1894~1970)

임이여, 어디 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오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쩌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임이여, 못 살겠고, 임 그리워 못 살겠소,
임 떠난 그 날부터, 겪는 이 설움이라,
임이여, 어소 오소서, 기다리다 애타오.
*임=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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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마침내 한글학회의 『큰 사전』이 완성되고 난 후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에 정세권이 쓴 글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이 실렸습니다. 그 일부분을 읽으며 그의 조선어학회 활동 참여 동기를 살펴봅시다.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

(큰 사전 완성하는) 날을 당하여 지난 일을 돌아보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삼십 년 전 어느 날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석상에서 한 선생님(이극로 추정)을 맞이하여 그 포부를 물어보았더니 그 선생이 말씀하기를 “한 민족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통일된 말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말이 있어도 통일된 글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글까지 있어도 사전이 없으면 문화 민족으로 행세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은 말과 글이 오래 전부터 있으나 통일되지 못하였고 사전이 없으니 나는 이 점을 깊이 느끼어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을 완성하는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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