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설명
본 [자료]는 1976년 손수광이 그린 *민족기록화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순국’이다. 1905년 11월 17일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1861~1905)은 문과 급제 후 정부요직을 역임하며 군제개혁에 힘쓰고 관민공동회를 개최한 독립협회를 후원하여 황권강화와 민권의 신장을 함께 도모한 인사이다.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여왕 즉위 60주년 식에도 참석하는 등 외교관의 역할도 수행한 대한제국 시기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1905년 일제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에게 조약파기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국권이 침탈되어 가는 시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절망한 그는 결국 굴욕적 조약 체결 13일 후인 11월 30일 오전 6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자료]속에는 서구식 예복을 입은 깨끗하고 창백한 민영환의 시신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한복 및 관복을 입은 8명의 모습, 그리고 문밖에는 스님이 염불을 외고, 하인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실 이는 실제 상황과 다른 표현으로, 문밖 승려와 마당 석등으로 보아 조계사 뒤편에 있었던 민영환의 자택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나, 실제 민영환은 의관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했다. 또한, 민영환의 자결장소를 드나들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른 새벽에 자결한 민영환의 시신은 아침 일찍 본가로 옮겨져 목격자는 하인 두어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한편, 책상 위에는 작은 명함에 쓰인 유서와 두루마리에 감겨있는 유서, 바닥에 긴 종이에 적힌 펼쳐진 유서 총 3통이 그려져 있어, 실제로 민영환이 2천만 동포에게, 외국사절들에게, 고종황제에게 각각 유서를 남긴 사실을 충실히 담으려 한 노력도 엿보인다. 이 기록화는 비록 역사적 고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강압적으로 맺어진 부당한 조약에 분개하고 자결로써 항거의지를 표출했던 한 인물의 안타까운 순국 사건과 그 메시지를 담은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그해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체결을 강요하며 한국을 일제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정책을 이어왔다. 결국 1905년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연이어 추진하며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것에 대한 열강의 묵인을 얻은 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맺음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을사늑약은 고종이 참석하지 않았고 오늘날 을사오적이라고 불리는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이 참석한 회의에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었다.
● 민족기록화: 1967년-1979년 사이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정부의 지원 아래 당대 유명 화가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문화·경제발전상 등을 주제로 그린 대형 회화 작품을 뜻한다.
참고문헌
김경미, 「혈죽의 노래」, 『월간 독립기념관-11월호』, 독립기념관, 2019.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1980.2.26.)」, 『경향신문』,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