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설명
[자료1]은 오른쪽 상단부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 융희황제)의 사진과 함께, 장례행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하단부에 “병인삼월십사일승하 / 고 이왕 전하 / 병인오월일일 인산”이라고 음력 날짜와 함께 짧은 설명이 적혀있어 이 사진이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에 찍힌 것을 알 수 있다.
1926년 4월 25일(양력),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만 52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국 곳곳에서 망곡 (望哭, 장례에 직접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을 뜻하는 말)과 봉도(奉悼, 존경받는 인물의 업적과 공덕을 기리며 애도함을 뜻하는 말)와 같은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자료2]는 『순종장례식화보』 7쪽에 수록된 사진으로, 순종 승하 당시 창덕궁 정문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순종이 승하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인 1926년 6월 10일인 인산일에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먼저 3·1운동과 같은 ‘제2의 만세시위운동’을 구상하며 시위를 추진하였고, 준비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천도교 세력이 참여하며 조직적 연대를 이루었다.
시위 과정은 다음과 같다. 6월 10일 오전 8시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시내를 거쳐 금곡 유릉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순종의 장례행렬에는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30여만의 인파가 운집했다. [자료3]은 『순종장례식화보』 24쪽에 수록된 인산일 당일 서울 시내 광경 사진으로, 장례행렬을 직접 접하려고 몰려든 인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사전에 계획을 알고 있었던 일제는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까지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와 감시를 벌였다. 오전 8시 반, 종로 3가에서 국장 행렬이 통과하자 중앙고보 학생 30-40여 명이 “만세”를 외쳤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학생들은 곳곳에서 군중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는 인근 학교의 담을 무너트릴 정도로 격렬했지만 일반 군중들은 일제의 삼엄한 경계에 눌려 별다른 호응을 할 수 없었다. 오후 2시경까지 9개 곳에서 진행된 이날의 만세운동은 1,000여 명의 학생들 위주로 전개되었고, 결국 210여 명에 달하는 학생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학생들과 일반인은 봉도와 망곡, 동맹휴학 등으로 항거의지를 표출했다.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정치적 이념을 초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연대하여 추진된 6·10만세운동은 거사 직전인 6월 6일에 일제에 의해 계획이 발각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서울을 중심으로 장례식 당일의 짧은 기간 동안 학생들 위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비록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큰 규모로 전개되지는 못 했지만,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이후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 ‘신간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더불어, 시위 과정에서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면서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고 학생운동 역량이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참고문헌
김성민, 「민족협동전선의 첫발, 6·10만세운동」, 『월간 독립기념관-2022년 6월』, 독립기념관,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