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가면 행촌동이 있다. 1914년 은행동과 신촌동을 합쳐서 만들어진 동네로 이 중 은행동은 임진왜란 때 맹활약을 한 권율장군의 집터에 있는 은행나무가 유명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500년 이상 된 이 나무를 볼 수 있는데 서울 도심의 나무 중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위엄 있고 아름답다. 오래전 그 은행나무를 보고 반해 인근에 집까지 지은 외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3·1운동을 외국에 처음 알린 미국 AP통신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이다.
앨버트는 1896년 금광 기술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금광사업과 무역업을 하였으며 UPI 통신의 서울 특파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1917년에 영국 출신의 아내 메리 린리와 결혼을 하여 1919년 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1919년은 3·1운동이 있던 해였다. 당시 메리는 출산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있었는데 일본경찰이 독립선언문 사본을 찾으려 병원을 수색했고, 미국인 병실을 함부로 뒤지지 못할 거라 판단한 조선인 수간호사가 메리의 병실에 선언문 사본을 숨겨둔다. 이후 병실을 방문한 앨버트가 그 사본을 발견했고, 그의 동생인 윌리엄이 몰래 몸에 지니고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 통신사를 통해 보도함으로서 한국의 3·1운동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앨버트는 어느 날 아내 메리와 한양도성의 성벽을 걷던 중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 첫눈에 반했는데, 그 나무가 바로 행촌동 은행나무였다. 나무 주위의 풍광도 너무 마음에 들어 그는 인근 토지를 매입해 1923년 영국과 미국의 주택 양식이 혼합된 지하 1층, 지상 2층의 양옥을 짓고, 인도 딜쿠샤궁전(힌두어로 기쁨이란 뜻)에서 이름을 따 ‘딜쿠샤’라 지어 불렀다. 앨버트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까지 이 집에 머물렀다. 테일러가 떠난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서울시가 2018년부터 원형복원작업에 착수, 2020년 전시관으로 조성되어 개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