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6~8월경의 찍은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단의 사진이다. 대표 김규식, 부대표 이관용, 서기
황기환과 외교활동을 위한 사무를 지원했던 여운홍과 조소앙, 그리고 파리위원부 사무실(샤토덩 38번지)의 주인이었던 ‘에밀 블라베’ 부부가 같이 촬영했다. ‘에밀 블라베’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던 파리 ’한국친우회‘의 재무국장을 지낸 인물로 단순한 집주인이 아니라 한국에 우호적인 프랑스인이었다.
뒷줄 O·이관용·조소앙·O·O·O·O·황기환
앞줄 여운홍·에밀블라베 부부·김규식
|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열린 국제회의로 파리에서 1919년 1월 12일부터 6월 28일까지 열렸다. 독립운동가들은 한국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다.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1881~1950)은 4월 파리 한 가운데에 있는 샤토덩 38번지 건물의 4층에 ‘한국민 대표부’를 설치하고 ‘한국통신국‘을 두어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외교활동과 공보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대표단은 1919년 5월경 파리강화회의 측에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그 사본을 각국 원수와 국회·정부 및 주요 정치가·언론기관 등에 발송하였다. 이와 더불어 각국 대표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지 확보, 일본 통치하 한국사정 폭로, 극동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지리적·전략적 중요성 홍보, 유력한 언론기관의 협조를 통한 한국에 대한 동정적 여론 조성 등을 전개해 나갔다.
파리에서의 외교활동을 위해 적합한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대표 김규식의 요청으로 5월 20일경쯤에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유학 생활하던 이관용이, 6월 3일에는 황기환과 여운홍이 합류했다. 황기환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으로 유럽 전선에서 활약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6월 말에 조소앙도 파리에 도착하여 외교활동을 위한 사무를 보좌했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미국으로 가고, 이관용도 박사과정을 계속하기 위해 스위스로 돌아간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황기환이 주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황기환(?~1923)은 1920년 9월 런던사무소를 개설하고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외교선전활동을 전개해 나가다 1921년 8월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