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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유서

민영환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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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교과서Text Book

  • 고등학교 한국사(금성)

전시물설명Explanation

 민영환(1861~1905)이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경에 자결하면서 자기 명함에 쓴 <한국인민에게 보내는 유서>이다.
 
 유서가 시작되는 명함에는 <육군부장 정일품 대훈위 민영환(陸軍副將正一品大勳位 閔泳煥)>이라고 직함과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그 위에 쓰여진 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가운데에 모두 멸망하리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나니, 제공들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에 보답하고 그리하여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저승에서라도 제군들을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더 분발하고 힘을 써서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두운 저 세상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의 2000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당시 육군부장 *시종무관장이던 민영환은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무효를 주장하며, **5적 처단 상소를 올렸다.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죽음으로써 국민을 일깨우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머물고 있던 의관 이완식의 집을 나서 본가로 향해 가족들을 잠시 만난 후, 다시 돌아와 고종과 2000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했다. 을사늑약 체결된 지 13일째인 1905년 11월 30일 동 틀 무렵, 민영환은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1906년 7월 4일, 민영환이 자결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모셔둔 마루방에서 유족이 네 줄기의 푸른 대나무가 자란 것을 발견했다. 민영환이 자결한지 7개월여가 지나는 동안, 일본의 ‘보호국’이 된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취임하던 때였다. 제보를 받은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바로 7월 5일 자에 「녹죽이 저절로 자라남」 이라는 기사를 싣고, 민영환의 녹죽을 정몽주의 선죽에 견주며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개와 충성을 나타낸다고 보도했다. 이후 각 신문에는 혈죽을 소재로 한 시가가 끊임없이 실렸으며 『대한매일신보』는 7월 17일 자에 화가 양기훈이 그린 혈죽도를 광고를 싣던 4면을 모두 비우고 전면에 담았다. “이 그림을 인쇄하여 널리 펴내니 ‘충절’을 애모하는 여러분들은 즐겨 감상하며 칭송하라.”며 그림을 실은 취지도 밝혔다.

*시종무관장: 대한제국 황제를 측근해서 호위하던 시종무관부의 으뜸 벼슬.
**5적(을사5적):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지 않고 서명한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

#혈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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