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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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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교과서Text Book

  • 초등학교 사회5-2
  • 중학교 역사2(천재교육)
  • 고등학교 한국사(동아출판)
  • 고등학교 한국사(천재교육)
  • 고등학교 한국사(비상교육)

전시물설명Explanation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1919년 8월 초부터 10월 17일경까지 사용한 초기 청사로 폐쇄 직전인 10월 11일에 찍은 사진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리고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조직되었다. 이후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9월 상하이에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수립되었다.
 
 미주에 있던 안창호(1878~1938)는 동포들이 모아준 독립운동자금 2만 5천 달러를 가지고 5월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 자금으로 구매한 건물이 바로 사진 속 임시정부의 청사로 상하이 프랑스*조계 하비로 321호에 위치해 있었다. 하비로는 쑨원을 비롯하여 중국 유력인사들의 저택과 근접해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교섭활동 추진하기에 용이했으며 근처 전차 정거장이 있어 교통접근성이 좋았다.
 
 일본의 유력지 『오사카아사히신문』 10월 22일자 「조선인의 본부 폐쇄되다/프랑스 관헌에 의해(상하이 특전 21일 밤)」 에 당시 청사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 321호의 불온 조선인의 본부는 프랑스 경찰로부터 폐쇄 명령을 받았다. 해당 명령은 17일에 나와 48시간 유예가 주어졌다. … 오랫동안 상해에 있으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끌던 빨간 벽돌의 아름다운 건물과 항상 문을 서서 망을 보고 지키고 있던 2명의 인도인, 끊임없이 출입하는 젊은 조선인의 양복 차림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묘하게 우뚝 솟은 본부의 창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볼 뿐이다.
 
 기사의 내용과 같이 임시정부가 폭탄을 제조한다는 이유를 들어 프랑스조계 당국으로부터 1919년 10월 17일까지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임시정부는 폐쇄 명령을 받자 10월 11일 청사건물을 찍고, 청사를 떠나며 건물 앞에서 직원들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 당국의 충고대로 대로상의 번듯한 청사 건물을 청사로 이용하지 않았다. 부서별로 그 책임자 거처에서 사무를 보았다. 유사시 피신하기 좋은 소규모 단위로 운영된 것이다. 이후 십여 차례 이전 끝에 1925년에 마당로 보경리 4호에 청사를 마련했고, 1932년 4월 윤봉길의거로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장시간 머물렀다.
 
 현재 상하이에 남아있는 정부 청사는 보경리에 위치한 것이 유일하다. 임시정부의 첫 청사는 김신부로에 있었으나 구체적인 호수가 기록된 자료가 없어 현재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조계: 19세기 후반에 영국, 미국, 일본 등 8개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

#대한민국임시정부재상해직원일동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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