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격퇴를 위해 만들어진 돌격선이다. 전시관의 재현물은 조선 정조 때 사용했던 거북선을 기초로 하여 1/2.5로 축소한 것이다.
거북선은 이순신(1545~1598)의 고안에 따라 군관 나대용 등이 실제로 건조해 임진왜란 초반 잇따른 바다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은 그가 저술한 『이순신행록』에 거북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을 모두 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을 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귀선(거북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으로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었다. 또 적선이 포위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활용하여 싸운 해전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1592년 7월에 있었던 한산도대첩이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바다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한 일본은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견내량(통영과 거제도 사이)으로 접근했다. 견내량이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지역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조선의 판옥선 5척으로 왜선 73척을 한반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작전대로 병선 50척으로 학이 날개를 펼치듯 왜선을 좌우로 에워싸고 ‘학익진’ 전술을 펼쳤고, 거북선 3척은 왜선을 향해 돌진하며 공격했다.
한산도대첩으로 왜선 47척이 침몰하고 왜군 수백 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으나 조선 수군의 병선은 단 한척의 손실도 없었다.
거북선과 이순신은 이후 우리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며 민족적 자부심을 북돋우는 역할을 했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을 때 한국인들의 항일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교과서에 실렸는데, 대표적으로 현채의 『유년필독』 등이 있다.
#『유년필독』